개발에도 자존심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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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6-11-22 13:17 조회21,68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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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에 대한 실존적 물음
역시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묻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의미의 과잉이 더러 버거울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개발의 의미’와 치열하게 대결해야 한다. 그건 이미 우리들의 실존적 물음이다. ‘하나의 요청’으로서의 상정이다. 누구에게나 스스로 자기 삶을 구성해나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실존이라는 주체’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발에 대해 말이 많다. 그건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지역사회를 ‘보다 나은 세계’로 이끌기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다. 그게 문제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분노하고, 그리하여 무엇에 대해 저항할 것인가를 모른 채, 우리들의 주의력은 끊임없이 분산되고 흩어지려 한다.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수한 잡담 속에 갇힌 채’ 시간만 소진하고 있다.
그 ‘부재의 공간’에 ‘장밋빛 환상’만이 가득하다. 구호가 화려할수록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현실은 그만큼 그늘지게 마련이다. 화려한 계몽의 언어는 언제나 허구적이다. 그건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항상 이익의 문제와 관련된다. 개인의 특수한 이익을 마치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공동의 이익인 양 위장하여 확대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세계관을 농락하고, 성찰의 기회마저 앗아간다.
아! 이 기이하고도 낯선 부조리
‘바람직한 개발 방향’은 그것에 대한 비판과 그 응답과정에서 성립된다. ‘개발의 의미’는 여기에 나열된 검은 글자에 덧붙여진 게 아니다. 그것은 ‘개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뜻한다. 개발을 인식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엇을 욕구할지는 우리들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그렇다. 독단적 주장의 폭력 앞에서 자꾸만 무기력해지려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성격에 맞는 방법론을 선택하는 데 있다. 때로는 가슴 벅차게, 때로는 생명의 에너지를 느낄 정도로….
어쩔 수 없이 발전은 개발이라는 역동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개발심리는 ‘성장의 망상체계’가 일상적으로 표출되는 형태인 것을…. 성장률의 가속이 선출직 공무원들의 신성한 임무인 양 간주되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정책의 실체는 분명 개발지상주의와 다름없으면서도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여 중도적 외피로 가장한다. 서슬 퍼런 개발의 모습에 사람들이 놀랄까봐 가면을 씌워놓는… 그런 정치환경에선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역발전을 저해하고, 불변의 역사법칙에 도전하는 불순한 세력으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언제 우리에게 ‘우리의 개발’이라는 게 있었던가? 과거의 ‘종합개발계획’이나, 지금의 ‘국제자유도시’가 다 그렇다. 지역주민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그들만의 ‘정치적 설계’일 뿐이다. 지역주민들에 이해 추동되지 않고, 늘 타자와 그 영향, 그로인한 염려와 조바심으로 물들어 있어 한순간도 ‘자기로부터’인 적이 없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되 ‘자기 것’이 아닌, 이 기이하고도 낯선 부조리! ‘이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방(異邦)의 느낌을 느껴본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개발사업자가 ‘우리가 봉이냐’고 대놓고 윽박지르는 이 시대…. 우리들은 개발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의지, 상념과 충동으로부터 이를테면 소외돼 있다. 여기서 ‘자기의식’은 표류한다.
제주가 그렇게 ‘만만한 곳’인가?
문제의식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리 보인다. 개발에 대한 인식도 다르지 않다. 그 어떤 경우에도 개발을 오로지 물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변혁의 이념을 가지고 능동적 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좀 진부하지만, 사무치게 그래야만 한다. 우리가 개발을 단순히 평면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제주사람’이 ‘제주’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생활터전을 가꾸어 나가는 입체적 과정으로 보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그곳에선 “토지 값이 얼마나 올라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비즈니스일 뿐” 따위의 말은 통하지 않는다. ‘도민은 반성하라’고? (제주의소리 11월 9일) 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였던가? 그렇게 ‘쉬운 곳’이였던가?
우리고장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길거리에 나서면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가 느끼는 행복은 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 아니, ‘행복’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새삼스럽다. 사람들은 개발이 경제성장을 가져오고, 그게 만족을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웬걸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만족을 주던 것들이 개발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 사회적 유대도 취약해지고, 사람들의 품성마저 야금야금 병들고 있다. 그건 우리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모순이다.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근본적인 사회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주류의 사람들은 그걸 그저 지엽적인 문제로 몰고 갈 뿐이다.
개발도 필요하고, 경제성장도 이뤄야 한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유형의 개발이지, 제주의 자연을 파괴하고, 특혜로 얼룩진 그런 유형의 개발이 아니다. 물론 일자리 창출도 중요하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무모한 개발로 우리 자연이 훼손되고, 그리하여 우리들의 생활이 거칠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평균소득이 늘더라도 그 이면에 불평등이 확대된다면, 삶의 터전을 잃고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결국 그들은 예전에 파먹고 살 자투리 경작지라도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땅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오라관광단지 개발은 차라리 ‘후대의 몫으로’
이른바 ‘오라관광단지’ 문제는 복합적이다.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도민이 반대하면, 개발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건 개발의 원론적 문제다. 우리들의 ‘개발 자존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지역은 대규모로 개발할 수 있는, 우리들의 거의 마지막 땅이며, 한라산국립공원 바로 밑에 위치한 제주시 핵심 중산간 지역이다. ‘그런 땅’위에 ‘그런 시설’이 들어선다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들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다. 자존(自尊)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자화상의 문제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자존심 없이 먹는 밥은 ‘굴종’이다. 행복한 삶의 척도 중 그 첫째가 ‘자아 존중감’이라는 연구결과에서 그것은 그대로 드러난다.
“…육지부에서 배를 타고 제주항으로 들어올 때 바다에서 보이는 한라산은 제주의 첫인상입니다. 지금 개발하고자 하는 오라관광단지는 바로 한라산의 얼굴과 같은 지역입니다.…당신은 정말 제주도민이 맞습니까? 부탁이니 당장 배를 타고 제주 앞바다에서 보이는 한라산을 보십시오, 그래도 그곳에 관광단지가 있어야 하는지?…” 가슴 벅차게 들리는, 한 네티즌의 부르짖음이다.(제주의소리 10월26일)
개발은 지역주민들의 자기실현이다.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모든 것은 우리의 문제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이 지역의 도덕적인 주체다. 그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확실한 방식’이다. 그게 바로 주민들의 합의하에 공동으로 행위를 하는 상황에서의 방법이다. 그러나 개발의 독점은 독선이다. 차라리 후대들에게 그 개발권을 넘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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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제주의소리DB
역시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의 의미를 묻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의미의 과잉이 더러 버거울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개발의 의미’와 치열하게 대결해야 한다. 그건 이미 우리들의 실존적 물음이다. ‘하나의 요청’으로서의 상정이다. 누구에게나 스스로 자기 삶을 구성해나갈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실존이라는 주체’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개발에 대해 말이 많다. 그건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지역사회를 ‘보다 나은 세계’로 이끌기 보다는, 그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하고 있다. 그게 문제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분노하고, 그리하여 무엇에 대해 저항할 것인가를 모른 채, 우리들의 주의력은 끊임없이 분산되고 흩어지려 한다. 지금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수한 잡담 속에 갇힌 채’ 시간만 소진하고 있다.
그 ‘부재의 공간’에 ‘장밋빛 환상’만이 가득하다. 구호가 화려할수록 그것에 의해 규정되는 현실은 그만큼 그늘지게 마련이다. 화려한 계몽의 언어는 언제나 허구적이다. 그건 이데올로기다. 그것은 항상 이익의 문제와 관련된다. 개인의 특수한 이익을 마치 모든 사회구성원들의 공동의 이익인 양 위장하여 확대 전파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우리들의 세계관을 농락하고, 성찰의 기회마저 앗아간다.
아! 이 기이하고도 낯선 부조리
‘바람직한 개발 방향’은 그것에 대한 비판과 그 응답과정에서 성립된다. ‘개발의 의미’는 여기에 나열된 검은 글자에 덧붙여진 게 아니다. 그것은 ‘개발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뜻한다. 개발을 인식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엇을 욕구할지는 우리들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그렇다. 독단적 주장의 폭력 앞에서 자꾸만 무기력해지려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문제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 성격에 맞는 방법론을 선택하는 데 있다. 때로는 가슴 벅차게, 때로는 생명의 에너지를 느낄 정도로….
어쩔 수 없이 발전은 개발이라는 역동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찌 하겠는가?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개발심리는 ‘성장의 망상체계’가 일상적으로 표출되는 형태인 것을…. 성장률의 가속이 선출직 공무원들의 신성한 임무인 양 간주되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정책의 실체는 분명 개발지상주의와 다름없으면서도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여 중도적 외피로 가장한다. 서슬 퍼런 개발의 모습에 사람들이 놀랄까봐 가면을 씌워놓는… 그런 정치환경에선 개발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역발전을 저해하고, 불변의 역사법칙에 도전하는 불순한 세력으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언제 우리에게 ‘우리의 개발’이라는 게 있었던가? 과거의 ‘종합개발계획’이나, 지금의 ‘국제자유도시’가 다 그렇다. 지역주민들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그들만의 ‘정치적 설계’일 뿐이다. 지역주민들에 이해 추동되지 않고, 늘 타자와 그 영향, 그로인한 염려와 조바심으로 물들어 있어 한순간도 ‘자기로부터’인 적이 없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되 ‘자기 것’이 아닌, 이 기이하고도 낯선 부조리! ‘이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방(異邦)의 느낌을 느껴본 적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개발사업자가 ‘우리가 봉이냐’고 대놓고 윽박지르는 이 시대…. 우리들은 개발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감정과 의지, 상념과 충동으로부터 이를테면 소외돼 있다. 여기서 ‘자기의식’은 표류한다.
제주가 그렇게 ‘만만한 곳’인가?
문제의식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리 보인다. 개발에 대한 인식도 다르지 않다. 그 어떤 경우에도 개발을 오로지 물질적 성장을 추구하는 과정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변혁의 이념을 가지고 능동적 사회를 창조하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좀 진부하지만, 사무치게 그래야만 한다. 우리가 개발을 단순히 평면적 문제로 보기보다는, ‘제주사람’이 ‘제주’라는 구체적 공간에서 생활터전을 가꾸어 나가는 입체적 과정으로 보는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그곳에선 “토지 값이 얼마나 올라가고 있느냐 하는 것은 비즈니스일 뿐” 따위의 말은 통하지 않는다. ‘도민은 반성하라’고? (제주의소리 11월 9일) 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제주가 그렇게 ‘만만한 곳’이였던가? 그렇게 ‘쉬운 곳’이였던가?
우리고장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길거리에 나서면 현기증을 느낄 정도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가 느끼는 행복은 전보다 나아진 게 없다. 아니, ‘행복’이라는 단어가 오히려 새삼스럽다. 사람들은 개발이 경제성장을 가져오고, 그게 만족을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웬걸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만족을 주던 것들이 개발로 인해 파괴되고 있다. 사회적 유대도 취약해지고, 사람들의 품성마저 야금야금 병들고 있다. 그건 우리 지역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모순이다. 일부 뜻있는 사람들이 근본적인 사회변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주류의 사람들은 그걸 그저 지엽적인 문제로 몰고 갈 뿐이다.
개발도 필요하고, 경제성장도 이뤄야 한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유형의 개발이지, 제주의 자연을 파괴하고, 특혜로 얼룩진 그런 유형의 개발이 아니다. 물론 일자리 창출도 중요하다. 어쩌면 그게 우리의 시급한 과제다. 그러나 무모한 개발로 우리 자연이 훼손되고, 그리하여 우리들의 생활이 거칠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평균소득이 늘더라도 그 이면에 불평등이 확대된다면, 삶의 터전을 잃고 열악한 환경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결국 그들은 예전에 파먹고 살 자투리 경작지라도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땅을 잃게 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오라관광단지 개발은 차라리 ‘후대의 몫으로’
이른바 ‘오라관광단지’ 문제는 복합적이다.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도민이 반대하면, 개발하지 않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건 개발의 원론적 문제다. 우리들의 ‘개발 자존심’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거론되고 있는 지역은 대규모로 개발할 수 있는, 우리들의 거의 마지막 땅이며, 한라산국립공원 바로 밑에 위치한 제주시 핵심 중산간 지역이다. ‘그런 땅’위에 ‘그런 시설’이 들어선다는 것은 정말이지, 우리들의 자존심에 관한 문제다. 자존(自尊)은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자화상의 문제다. 자존심이 밥 먹여주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자존심 없이 먹는 밥은 ‘굴종’이다. 행복한 삶의 척도 중 그 첫째가 ‘자아 존중감’이라는 연구결과에서 그것은 그대로 드러난다.
“…육지부에서 배를 타고 제주항으로 들어올 때 바다에서 보이는 한라산은 제주의 첫인상입니다. 지금 개발하고자 하는 오라관광단지는 바로 한라산의 얼굴과 같은 지역입니다.…당신은 정말 제주도민이 맞습니까? 부탁이니 당장 배를 타고 제주 앞바다에서 보이는 한라산을 보십시오, 그래도 그곳에 관광단지가 있어야 하는지?…” 가슴 벅차게 들리는, 한 네티즌의 부르짖음이다.(제주의소리 10월26일)
개발은 지역주민들의 자기실현이다. 그렇다. 누가 뭐라고 해도, 모든 것은 우리의 문제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바로 이 지역의 도덕적인 주체다. 그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당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확실한 방식’이다. 그게 바로 주민들의 합의하에 공동으로 행위를 하는 상황에서의 방법이다. 그러나 개발의 독점은 독선이다. 차라리 후대들에게 그 개발권을 넘겨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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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정홍 언론인. ⓒ제주의소리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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